第 9. 일상무상분(一相無相分) - 하나의 相도 相이 아님

수보리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수다원(Srotapanna)을 증득한 사람이 자기는 수다원의 경지를 얻었다고 생각하겠느냐?

-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수다원이란 ‘흐름(流)’에 들어갔다는 뜻이기는 하지만, 어디에도 들어간 바 없으니(而無所入) 색.성.향.미.촉.법에 들어가지 않았기때문에, 수다원이라고 일컫는 것입니다.”

육조

수다원이란 범어이고, 唐나라 말로는 역류(逆流)이니 “거슬러 흘러감”이라. 생사의 흐름을 거슬러서 육진에 물들지않고, 한결같이 무루업(無漏業)만 닦아서, 결국 지옥.아귀.축생의 과보를 받지않음.

流는 聖人의 무리이니, 수다원의 사람이 이미 거친번뇌를 여읜까닭에, 성류(聖流)에 들어간 것이요, 而無所入은 果를 얻었다는 마음이 없는 것이니, 수다원이란 수행의 첫 결과니라.

규봉

수다원은 여기에서 入流이니, 聖流에 들어감. 입류는 예류(預流)라고도 하니, 성류에 첨예한 연고임.

수보리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사다함(Sakrdagamin)을 얻은 사람이 자기가 사다함의 果를 얻었다고 생각하겠느냐?

-“그렇지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사다함은 ‘한 번 오고간다(一往來)’는 의미이긴 하지만, 실은 오고감이 없기때문에(而實無往來) 사다함이라 이름한 것입니다.

규봉

죽으면 천상에 갔다가 한 번 인간으로 와서, 곧 사다함과를 얻으므로 一來라 함. 而實無來란, 이미 無我를 깨달았거니와 누가 능히 往來하리오.

육조

사다함은 범어이고, 唐言으로는 ‘一往來’이니, 삼계의 결박을 버려서 삼계의 결박이 없으므로 사다함이라 함. 인간이 죽어 천상에 태어나고 천상에서 곧이어 인간으로 태어나서, 마침내는 생사를 벗어나 삼계의 업이 다하는 것.

수보리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아나함(Anagamin)얻은 사람이 자기가 아나함과를 얻었다고 생각하겠느냐?

- “그렇지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아나함이란 ‘오는 것이 없다(不來)’는 뜻이긴 해도 실은 오지않음도 없기 때문에(而實無不來) 이를 아나함이라 이름합니다.

함허

佛法이 佛法이 이미 아닐진대, 차별의 聖果인들 무슨 實이 있으리오.

규봉

아나함은 不來(오지않음), 不還(돌아오지 않음). 죽어서 천상에 가서는 下界에 돌아오지않음

육조

아나함은 범어. 唐言으로는 불환(不還), 欲界에서 벗어남(욕심낼만한 경계가 없음)

부대사

“범부를 버리고 聖位에 처음 듦이여, 번뇌가 점점 경미해지도다. 人․我의 집착을 끊어버리고 비로소 무위에 이르렀도다.…

야부

諸行無常하여 一切皆苦로다.

“三位의 聲聞이 이미 塵에서 벗어났으나, 왕래하며 靜을 구하니 친하고성금(親疎)가 있음이로다. 확연한 四果(수다원.사다함.아나함.아라한)는 원래 果라는 것이 없으니, 허망한 몸뚱이가 곧 法身이로다.”

함허

皆苦는 다른 책에 皆空이라하니, 空자가 더 가깝도다. 四果는 果가 없어서 하나의 묘한 空에 돌아가도다.

“육진 경계에서 벗어나긴 했으나, 열반의 城속에는 친소(親疎)가 있음이라…허망한 몸뚱이가 곧 법신이라 함이여, 혼융하고 평등하여 친소가 없네.

수보리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아라한(Arahan)의 경지를 증득한 사람이 자기가 아라한과를 얻었다고 생각하겠느냐?

-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실로 아라한이라고 할 법이 없기때문입니다.(實無有法名아라한). 세존이시여, 만약 아라한이 ‘내가 아라한의 道를 얻었다’는 생각을 지으면,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에 집착하는 셈입니다.

육조

모든 번뇌가 이미 다하여 다시 번뇌가 없으므로, 아라한이라 함. 범어이니, 唐言에는 무쟁(無諍)

(수보리의 계속되는 답변)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수보리는 무쟁삼매(無諍三昧;다툼이없는 삼매)를 얻은 사람 가운데서 제일이다. 욕심을 떠난 제일의 아라한이다” 세존이시여, 그러나 저는 자신이 욕심을 떠난 아라한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만일 제가 아라한의 경계를 얻었다고 분별한다면, 세존께서는 저에게 아란나행(Aranya무쟁처,적정처)을 얻었다고 말씀하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저는 실로 아무것도 행하는 바 없기에(實無所行) 아란나행을 즐긴다고 일컬어지고 있습니다.

함허

무쟁(無諍)=이욕(離欲) ; 안으로 보고들음의 끄달림을 입지않고, 밖으로 소리와 모양에 물들지않아서, 안팎으로 청정하고 확연함

규봉

무쟁이란, 중생을 번거롭게 하지않음이니 능히 중생으로 하여금 번뇌를 일으키지 않게 하는 연고임.

육조

무쟁삼매란, 아란한의 마음에 생멸거래가 없고 오직 本覺이 항상 비춤. 삼매(Samadhi)는 범어. 唐言으로는 正受, 正見

야부

把定하면 구름이 골짜기에 걸쳐있고, 放下하면 달이 연못에 떨어지도다.

“말(馬)이라고 부른들 어찌 말이 되며, 소라고 부른들 반드시 소가 아니로다. 두 가지를 모두 놓아버리고 中道에서 일시에 쉴지어다…”

함허

잡아정함(把定)이 옳은가, 놓아버림(放行)이 옳은가. 파정, 방행이 모두 옳지않으니, 한번에 삼천세계 밖으로 쓸어버리도다.

“말이라 부르고 소라고 부르는 것이 모두 그렇지않아서 방행(放行)과 파정(把定)이 옳지않으리라…”

규봉

무소행(無所行)이란, 論에 이르되 두 가지 장애를 여의는 것 - 번뇌장. 삼매장

아란나는 적정을 뜻함.

육조

아란나는 범어. 唐言에는 무쟁행(無諍行). 청정행(淸淨行)

부대사

生도 없고 滅도 없으며 我도 없으니 人도 없음이라. 번뇌장을 영원히 없애니 길이 후유신(後有身;뒤에 몸을 받음)을 받지않도다. 경계가 없어지니 마음도 또한 멸하여 다시는 탐진치를 일으키지 않음이라. 자비가 없어 공연히 지혜만 있어서 홀로 유연히 眞에 맡기도다.

야부

알았다고 말하면, 공부하기 이전처럼 도리어 옳지못하도다.

“조개속에 밝은 구슬 숨어있고, 돌속에 푸른 옥 감추어있어라…”

함허

名과 實을 모름지기 망각해야 비로소 옳은 것

“밝은 구슬과 푸른 옥은 숨어있어 드러나지 않으니, 큰 지혜자는 어리석은 듯하여 우치한 것 같으나, 道가 자기에게 있으면 저절로 밖으로 드러나게 되니…”

종경

인간과 천상에 오고가는 동안 모든 번뇌를 없애지못하였다가 道와 果를 함께 잊으니, 無諍이 제일이라

“果位의 聲聞이 홀로 一身만 다스리며, 적연하게 항상 定에 있음은 본래 眞이 아니로다. 마음을 돌이켜 몰록 여래의 바다에 들어가서, 자비의 배를 거꾸로 돌려 건너는 사람을 맞이해야 함이로다.”

함허

범부를 초월하여 성인에 들어감이여, 처음부터 증득을 감당하여 왔는데, 어찌 死水에 잠기리요

“聲聞처럼 홀로 善함은 어진 사람이 할 바가 아니며, 만약 어진 사람이라면 아울러 천하를 다 善하게 해야 함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