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즈음에, 예기치 못한 사고로 큰아이 왼팔꿈치 관절이 부러지는 사태를 맞게 되었다. 골절 수술 후 입원치료
기간중에 아버님 49재를 맞게 되었고 불가불 큰아이와 나는 참석할 수가 없게 되었다. 속상하고, 죄송하고,
우울한 심정이야 어찌 형언할 수 있을까.

여하튼, 극히 자연스런 계기로 우리 가족과 부처님과의 인연이 맺어지게 되었다. 그 인연으로 말미암아 시어
머님은 부처님의 말씀을 배우고 행하는 불제자로서의 이름표를 가슴에 붙히고 열심으로 절에 다니는 신입생
이 되셨다. 부처님과의 만남 이후 내게 변화가 찾아왔다. 분주한 시간을 틈내어 그분 말씀을 읽고 느껴가며
퐁요해진 무형적 만족감에 저으기 놀라고 있었다.

아직은 두아이 치닥거리에 절에 오를 기회가 쉽지않은 터라 아쉬움은 그리움으로 채워놓고 일년에 한번 사월
초파일만은 세상이 두쪽나도 상관없다는 일념으로 아이들 챙겨 손잡고, 등에 업고 들뜬 설레임까지 가슴에
포개업고 숨을 몰아 절에 올랐다. 부처님 만나는날 기분이란 초등학고 첫소풍때, 며칠전부터 잠못이루던 기
대감과 아주 비슷하였다.

구구절절 좋은 말씀에 고개를 끄덕이며 거창한 신도인냥 흉내를 내지만, 솔직히 참된 말씀의 깊은 진리를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그분만을 그리워하는 철없는 신도임을 짐짓 미안해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그런 생활
속에서 참으로 어이없이 끔찍한 불행이 찾아들었다. 친정어머니가 암이란 진단과 함께 시한부 삶을 선고 받
으신것이다. 급성위암이 간까지 전이되어 손쓸겨를도 없이 시시각각 죽음을 향해 질주하는 어머니의 고통앞
에 잔인한 슬픔은 눈물마저 돌려 앉혔다. 어머니는 대수롭지 않은 노환에서 오는 합병증쯤으로 알고계셨기에.

30여년간 슬퍼했던 숱한 눈물의 곱절도 넘는 눈물을 마구 떨구고 훔치고 다녔다. 그 기막히는 서글픔은 어떤
수식어로도 설득력이 없으리라. 고작 할수있는 일이란 위장한 웃음으로 치료약의 효과를 강조하는것과 뒤돌
아 오면서 펑펑우는 일밖에.

세상이 멈춰지고 시간은 먹빛인채로 올려다 본 하늘은 강물이었다. 주체못할 슬픔에 허우적일때 부처님은
홀연히 내게 오셨다. 아니, 절실한 무엇이 그 분을 찾아 부른것일까. 무턱대고 그분을 향해 달음질쳤다. 좌우
가릴 여유도 잊은채 밤 늦은 시각에 산길을 헤쳐올라 법당문을 열었다. 발을들이는 동시에 내 눈에서는 폭포
같은 눈물이 흘러내렸다.

- 누구와 시합이라도 하듯 절을 했다-
- 사지가 후들거려 가부좌로 앉으니-
- 갑자기 눈이 부셨다 “꿈인가…”-

어머니앞에서 감춰야 했던 슬픔덩이가 송두리째 쏟아져 오랫동안을 엎드려 울고만 있었다. 눈꺼풀의 중량
을 무겁게 느끼며 천천히 부처님을 바라보는 순간, 어머니 얼굴이 영상처럼 겹쳐보였다. 핏발선 눈을비벼 몇
번을 바라보아도 마찬가지였다. 흔치않은 경험이었다.

잠시 후, 나는 혼란스러웠다. 무엇을 빌어야 할지 종잡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피 토하는 고통을 감당하면서
라도 제발 살아계시길 빌어야 할지, 하루에도 몇번씩 이승과 저승을 들락거리는 고통을 끊고 편히 가시도록
빌어야 할지. 망설임을 알아 차린듯 스님께서 답을 주셨다. 부처님은 이미 내 마음을 보고계시니 열심으로
절을 해보라고. 굽힌 무릎을 펼 수 없을때까지 정말 열심히 절만 하였다.

이튿날, 제대로 디뎌지지 않는 발걸음을 간신히 추스려 법당을 나설때에 느꼈던 평온함이란 마치 잔잔한 강
물위에 푸른 하늘을 이고 누워있는 신선이 된 기분이었다. 이름하지 못하는 바램까지도 모두 맡아 헤아려 주
시리라는 확고한 믿음이 그것이리라. 그 날을 계기로 매주 토요일이면 법당에 틀어박혀 절을 하고 슬픔을 풀
어놓고, 번뇌를 조아렸다. 나의 기도는 경건하게 때로는 응석처럼 간혹은 투정으로 부처님께 쏟아놓는 눈물
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차분해지고 초연해지는 내 자신을 느낄 수 있었다.

절실함이나 간절함을 굳이 소리내지 않아도 좋았다. 그저 그 분앞에 내가 있음으로 이미 말하고자 하는 전부
를 보고 계셨으니까. 어느 날인가 무엇에 홀린 몸짓으로 곁의 누구와 시합이라도 하듯이 절을 하였다. 전신은
온통 땀으로 뒤범벅이되어 오로지 엎으리고 일어서는 일에 몰두하고 있었다. 3시간여 동안 그러다보니 사지
가 후들거리고 도저히 더이상 계속할 수 없는 지경에 다달아 조용히 가부좌를 틀고 참선자세로 앉아 있을때
였다.

감긴 눈 앞쪽이 눈부시게 밝아지는 것을 느꼈다. 순간, 혹시 초가 다 녹아 그 주위것에 불이 번졌나싶어 눈을
번쩍 떴다. 주위에 불길에 잡힐만한 무엇이 있을리는 만무였다. 법당문 틈사이로 스미는 달빛도 얌전하고 향
사뤄 번진 희뿌연 연기속에 은은한 촛불역시 한 점 흔들림없이 꼿꼿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앉은채로 잠깐 꿈
을 꾼것인지.

다음날 산을 내려와 친정에 들렸을때 어머니는 간밤의 꿈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돌아가신 아버지가 찾아와
문을 열었는데 밖이 어찌나 캄캄한지 모습은 안보이고 목소리만 들으셨단다. 지금 가려는 곳은 부귀영화에
호의호식하며 평생을 부러울 것없이 사는곳이라 서로 앞다퉈 들어가려는데, 일단 들어가면 자식들 보고싶어
도 나올 수가 없으니 서두르지 말라셨단다. 아무리 좋은곳이라 해도 순서를 기다렸다 들어가라고 말씀하시
더란 것이다. 그래서 꿈에서조차 너무 오랜만이라 좀 들어오라고 하니 급히 가 볼 곳이 있어서 시간이 없다며
나중에 오겠다는 아버지를 급히 부르다 눈을 뜨셨다했다. 벽에 걸린 시계를 보니 새벽 2시40분이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고. 나는 전신에 우르르 진동이 느껴졌다.

간밤 법당에서 내가 눈부셔했던 그 시간과 얼추 들어맞는 시간대였던 것이다. 엇비슷한 시간에 각기다른 곳
에서의 꿈. 그것은 하나의 희망이기도 했고 두려움이기도 했다. 지루하고 힘든 투병이 장기화되면서 어머니
는 나름대로 석연찮은 예감과 예사롭지않은 증세에 히스테리와 무기력을 악순환시키고 급기야 곡기를 끊은
채 약조차 거부하셨다.

우리는 마침내 결정을 하기에 이르렀다. 당신 스스로 정리할 시간을 드려야 한다고. 심장이 파열하는 비명은
오히려 신음으로 뿜어졌다. 들썩이는 어깨를 힘주어 놓고 우린 어머니의 병이 암이란 사실과 지금 상황에선
수술도 불가능하기에 끈기있는 의지로 병마를 물리치자고 설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