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승보살의 길 대승보살의 길
초기 대승경전 중에는 반야경의 공사상과는 달리, 불교의 궁극적인 이념은 결코 피안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 '성불'하는
데에 있다고 강력하게 주장하는 경전이 있다. 그것이 다름 아닌 법화경이다. 이 법화경을 통해 대승보살의 길을 논하여 볼까 한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법화경은 서설(序說)에 이어 곧 다음과 같은 놀라운 선언을 하고 있다. 지금까지 설해 온 교설은 크게 삼승(三乘)
으로 가를 수가 있으니, 4제를 닦아 아라한이 되고, 12연기를 닦아 벽지불이 되고, 6바라밀을 닦아 보살이 된다는 것이 그것이다. 그런데 이
러한 삼승의 고설은 임시 방편에 불과하고 진실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500여명의 퇴장이 있었다고 할 정도로 참으로 충격적인 선언이다.
그런 뒤에 부처님은 그가 세상에 출현한 목적은 오직 한 가지 일을 하기 위함이니, 그것은 곧 모든 중생들에게 부처님과 똑같은 깨달음을 얻
게 하고자 함이라고 하신다. 따라서 삼승은 있을 수가 없고, 오직 한줄기 성불에 이르는 '일불승(一佛乘)'만이 있을 뿐이다. 그리하여 모든
불자에게 부처님과 같은 무상(無上)의 깨달음을 얻겠다는 마음을 일으킬 것을 권하고, 불자로서 그런 발심을 하지 않는다면 그야말로 가장
심한 교만(增上慢)이라고 단정하고 있다.
아함경이나 반야경과는 다시 전혀 다른 차원이라는 것이 느껴진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고 있는 그 부처님의 깨달음이란 과연 어떤 내용의
것일까? 법화경은 이에 대해서 별로 설해주는 바가 없다. 다만 '모든 법의 실상(實相)은 오직 부처와 부처만이 서로 말할 수 있을 뿐' 피안에
이른 불퇴전(不退轉)의 보살도 감히 짐작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할 뿐이다.
그러나 법화경의 여러 가지 암시적 표현에서 우리는 그런 일불승이 지향하는 곳이 어디라는 것은 어느 정도 짐작할 수가 있다. 우선 부처님
의 열 가지 이름 중에서 맨 처음에 위치하고 있는 것은 '그렇게 온 자(如來)'라는 것인데, 이것은 일불승의 궁극적 지향점이 피안이 아니라,
그곳에서 다시 차안(此岸)으로 회향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그 다음은 '동등한 자(阿羅漢)', '바르고 원만하게 깨달은 자(정변각)'라는 이름이 따르고 있는데, 이것은 피안에서 차안에 돌아옴으로
써 그 두 세계가 가치적으로 동등해진 경계에서 모든 법의 실상을 바르고 원만하게 깨달은 것을 뜻한다
고 할 것이다. 나머지 이름들은 부처가 중생을 교화하는 기능들을 암시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법화경은 무상의 깨달음을 얻고자 발심한 사람들에게, 많은 부처님께 봉사한 다음 내세(來世)에 불국(佛國)을 건설하여 중생들
을 교화할 것을 명하고 있다. 이런 사명 부여가 수기(授記)라는 방법으로 표현되고 있는데, 그런 불국이 건설될 곳은 피안이 아니라 차안임은
다시 말할 필요가 없다. 그러기에 법화경은 자신의 교설을 더러운 땅에 피는 하얀 연꽃에 비유하고 있는 것이다.
법화경은 이와 같이 반야경의 피안 지향성을 인간의 현실 세계로 되돌리고 잇다. 그리하여 그곳을 적극적으로 정화할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 불교 현대화의 이념을 정립함에 있어서 법화경의 이런 일불승설(一佛乘說)은 크게 주목되지 않을 수가 없다.
삼승에 의하면 모든 교리는 분립하여 서로 배척하게 된다.
대승불교는 보수적인 상좌부(上座部)를 소승이라 비난하고, 상좌부는 대승경전을 부처님의 교설이 아니라고 공격한다. 그러나 일불승에 의
하면 소승과 대승은 다같이 성불에 이르는 한 줄기 길이다. 삼승에 의하면 보살은 반야경의 6바라밀을 닦는 보살에 한정되지만, 일불승에
의하면 처음 발심한 사람으로부터 아라한,벽지불,보살이 다같은 보살이 된다. 그러기에 법화경은 '부처는 오직 보살만을 교화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설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삼승의 교리를 한줄기 일불승으로 재조직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런 작업이 실제로 행해진 것이 화엄경의 보살 십지설(十地說
)이라고 할 수가 있다. 그 조직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환희지(歡喜地. pramudita bhumi) : 십대원(十大願)
2.이구지(離垢地. vimala bhumi) : 십선도(十善道)
3.발광지(發光地. prabhakari bhumi) : 삼법인(三法印)
4.염혜지(焰慧地. arcismati bhumi) : 삼십칠조도품(三十
七助道品)
5.난승지(難勝地. sudurjaya bhumi) : 사제(四諦)
6.현전지(現前地. abhimukhi bhumi) : 십이연기(十二緣起)
7.원행지(遠行地. duramgama bhumi) : 십바라밀(十波羅蜜)
8.부동지(不動地. acala bhumi) : 무생법인(無生法忍)
9.선혜지(善慧地. sadhumati bhumi) : 사무애지(四無碍智)
10.법운지(法雲地. dharmamegha bhumi) : 대법우(大法雨)
아함경(제 2-6지)에서 반야경(제 7-8지) 그리고 법화경(제 9-10지)에 이르는 교리들이 10지에 편입되어 일불승의 보살도를 구성하고 있는
것이다.
불교에는 방대한 양의 경전이 있다. 그 중에서 가장 권위 있는 것은 아함경과 같은 원시경전과 대승불교 초기에 성립된 초기 대승경전이라고
할 수가 있다. 따라서 그들은 전 불교의 가장 근본적인 경전이라고 말할 수가 있다.
그런데 그 속에 설해진 교리는 대개 이상 소개한 것으로 다하고 있는 것이다. 그 밖에 아미타불의 서방정토에 왕생할 것을 권하는 정토교리
가 있지만, 이것은 일불승의 보살도를 신앙적인 형태로 장엄한 것에 불과하다.
불교의 가장 근본적인 경전에 설해진 교리가 이렇게 일불승의 보살도로 다해져 있다면, 그것은 불교의 가장 근본적인 교리 체계요, 또 그것
은 불교 근본 교리의 전부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 불교 현대화의 이념을 경전적으로 정립코자 할 경우, 그것을 떠나 다시 어
디서 구할 수 있겠는가. 따라서 필자는 오늘날 한국 불교가 지향해야 할 종교적 이념은 바로 이런 '일불승의 보살도'이어야 한다고 본다.
이러한 필자의 견해는 일불승이 설해진 법화경이나 화엄경만을 최고의 경전으로 삼아 그것을 받들자는 입장이 결코 아니라는 것을 이해해
줘야 한다. 과거에 천태종이나 화엄종은 흔히 그런 입장을 취했던 것이다. 그들의 교상판석(敎相判釋)에 아함경이나 반야경이 언급되고 있긴
하지만, 그런 경전을 실제로 연구하거나 수행에 쓴 일은 거의 없었다.
필자가 뜻하는 바는 적어도 아함,반야,법화의 삼부경 만은 모든 불자가 다같이 지송(持誦)하고 연구하고 실천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삼부경
은 일불승을 구성하는 필수 불가결한 근본 요소이기 때문이다. 아함경의 연기론(緣起論)을 떠나 반야경의 공(空)은 이해될 수 없고 삼승의
교리 없이 법화경의 일불승은 있을 수 없다. '일불승을 셋으로 갈라 삼승을 설한다'는 법화경의 뜻을 깊이 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
아함,반야,법화의 삼부경에 흐르는 이러한 일불승의 보살도로 한국 불교 현대화의 이념을 삼는다면, 현재 우리 주변에서 볼 수 있는 여러 가
지 교리적 병폐도 시정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선교(禪敎)의 대립은 고려 시대 이래 한국 불교의 가장 고질적인 문제로 대두되고 있지만, 일
불승에 의하면 선,교는 말할 것도 없고, 염불과 송주(誦呪) 등이 다같은 보살의 행법이다. 또 요즘 계속해서 발생하고 있는 여러 가지 종파들
도 일불승에 의하면 다 같은 부처님의 가르침이 된다. 따라서 모든 불자는 서로 존경하고 사랑하면서 다같이 진지한 보살의 길을 걸을 수 있
게 될 것이다.
이제 이러한 일불승의 보살도가 현대사회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게 되는가를 생각해 보자.
보살은 원대한 원(願)을 발한 다음에 무엇보다도 먼저 십선업(十善業)을 닦도록 되어 있다(제 1-2地). 이런 10선업은 인(因)에는 반드시 그
에 상응한 과(果)가 따른다는 인과의 법칙에 입각해 있다. 따라서 불교는 어느 종교보다도 쉽게 자연과학을 수용할 수 있을 것이다. 자연과학
또한 그러한 인과율을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교에서 말하는 인(因)은 자연과학에서 말하는 인과 완전히 같은 것은 물론 아니다. 후자가 말하는 인은 자연계에서 발생하는 현상
에 대한 원인을 가리키고 있는 데에 대해서, 전자의 인은 업을 일으키는 인간의 자유의지(自由意志)를 뜻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불교
의 '업인'과 '과보'는 현대 민주 사상의 '자유'와 '책임'이라는 개념에 통한다. 그렇다면 오늘의 보살은 민주 시민으로 지극히 자유를 사랑하고,
그런 자유가 보장되지 않는 체제는 단연히 거부해야 할 것이다.
역사를 움직이는 힘은 무엇이며, 또 그것은 어떤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을까? 이런 물음에 대해 현재 가장 유력하고 큰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은, 그러한 근본 원인을 신(神)에 있다거나, 물질이나 경제에 있다고 보는 것이다. 보살은 이런 견해에 대해서도 방관만 하고 있을 수는 없
을 것이다. 역사를 움직이는 근본 원인을 인간의 의지이며, 그것이 어떤 선택을 하는냐에 인류의 운명이 달려 있다는 것이 그에게는 너무나
도 명백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세계는 이념적으로 동서로 대립하고, 경제적인, 종교적인, 인종적인 문제 등으로 끊임 없는 분쟁이 일어나고 있다.
언제 핵전쟁이 터져 전 인류를 멸망으로 이끌어갈지 알 수가 없다. 이런 대립과 분쟁을 해결할 수 있는 길은 무엇일까? '반야'보다도 더한
사상은 없을 것이다. 그것은 일체의 분별망집을 타파할 힘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반야바라밀은 전쟁을 막고 평화로운 하나
의 세계를 지향하는 강력한 실천 운동으로 전개될 수 있을 것이다.
현대 문명은 놀라운 물질적 혜택을 인류에게 가져왔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복지사회가 이루어진다고 볼 수가 있을까? 물질적 풍요로 정신을
오히려 타락하고, 하나밖에 없는 지구는 나날이 황폐해지고 있다. 이제 자연의 개발보다는 정신의 개발이 무엇보다도 시급한 과제라고 보살
은 외칠 것이다. 일불승이 지향하는 불국토(佛國土)는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지극히 풍요로운 복지사회를 뜻하기 때문이다.
특히 법화경의 상불경(常不輕) 보살은, 현대 기계 문명의 인간성 상실에 훈훈한 생명을 불어 넣을 것이다. 상불경 보살은 사람들을 만날 때마
다 "당신들은 틀림없이 부처님이 되실 것 입니다."고 합장 예배했다고 한다. 그런 말을 들은 사람이 화를 내고 꾸짖어도 그는 인간 예배를 멈
추지 않았으니, 현대의 인간성 상실에 불교인이 어떤 자세을 취해야 할 것인가를 그 이야기는 잘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화엄경의 십지품(十地品)에 각 계위의 보살들은 국왕이 되어 정치에 참여하는 일이 많다고 설해져 있다. 한국 불교가 전래 당시부터 국가와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었던 것은 그런 교설과
상응되는 점이 있다. 그러나 오늘날은 주권이 국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국민에게 있다. 그렇다면 불교인의 정치적 참여는 이제 국가보다는
국민에 더 큰 비중을 두게 될 것이다.
이상 일불승의 보살도가 현대 한국사회에서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는가를 몇 가지 예를 들어 살펴봤다. 이런 의미는 이 밖에도 많이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도 필자는 일불승의 보살도가 현대 한국 불교의 이념 정립에 주목할 만한 모델이 될 수 있을 것으로 확신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