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륵신앙

 

1. 미륵보살(彌勒菩薩)

   범어로는 마이트레야(Maitreya)이다. 미륵은 성씨이고 이름은 아지타(Ajita, 阿逸多)이다. 그의 성인 미륵은 자씨(慈氏)라 번역되고 이름인
아지타는 무승(無勝) 또는 막승(莫勝)으로 풀이된다. 또 혹자는 아지타는 성이고 미륵이 이름이라고도 한다.

   현우경 바바리품에 의하면, 미륵은 부처님이 마가다에서 호라동하고 계실 당시 바라나의 재상의 아들로 태어났는데 32상을 갖추었고 몸
은 자금색으로 빛났다고 한다. 그의 어머니는 본래 착한 성품은 아니었으나 미륵을 잉태하고부터는 왠지 가난한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풀고
모든 이를 평등하게 사랑으로써 대하게 되었다 하여 아이 이름을 미륵이라고 지었다고 전하고 있다.

   미륵은 석가모니 부처님의 교화를 받고 미래에 성불하리라는 수기를 받는다. 그리고는 석가모니 부처님보다 먼저 입멸하여 도솔천에 올
라가 그곳의 천인들을 교화한다. 그렇게 하기 56억7천만 년을 지나 다시 사바세계에 출현 화림원(華林圓) 용화수(龍華樹) 아래에서 성도하
여 3회의 설법으로 3백억의 중생을 제도한다고 한다.

   이때 제도를 받는 중생들은 석가모니 부처님시대에 살다간 모든 중생들이 이에 해당한다. 따라서 이 미륵보살은 석가모니 부처님의 업적
을 돕는다는 뜻에서 '보처(褓處)의 미륵'이라 하고 현겁 천불 가운데 제5불에 해당하며 이 법회를 '용화삼회'라 한다.

   신라 경흥의 삼미륵경소(三彌勒經疏)에 보면 미륵보살의 네가지 큰 서원이 설해지고 있는데, 1)교량과 선박이 중생을 건네주는 것과 같이
일체 중생을 제도해서 진리의 세계에 도달케하며, 2)허공과 같이 모든 중생과 만물을 널리 보살피며, 3)자신의 몸은 약수(藥樹)가 되어서
자기를 따르는 모든 사람들의 병고를 없애주고, 4)항하사와 같은 모든 중생이 성불할 때 모두가 제도되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한편 미륵상생경에는 일념으로 미륵불의 명호를 부르며 성심으로 참회하면 모든 악업이 청정해지며, 단지 미륵불의 명호를 듣고 합장하
는 것만으로도 오십겁 동안의 죄를 사면받을 수 있고, 미륵불께 예경하면 백업겁 생사죄를 소멸하며 용화회상에서 법문을 듣고 최상의 보리
심을 발하게 되리라고 미륵불의 공덕을 설하고 있다.


2. 용화세계, 미륵신앙 

   미륵신앙의 특징은 상생신앙과 하생신앙, 당래불(미래불)신앙, 지상천국신앙, 말세중생귀의처신앙 등으로 정리할 수 있다.

   용화수 아래에서 성불하기 이전까지를 미륵보살이라 하고 성불한 뒤를 미륵불이라 하는데, 도솔천에 거주하는 동안 미륵보살의 곁에 태
어나기를 희망하는 신앙이 상생신앙(上生信仰), 오탁악세 등 사회의 윤리와 도덕이 피폐되고 대중이 못살게 되므로 미륵보살이 하강하여
제도하여 주기를 희망하는 신앙이 하생신앙(下生信仰)이다. 주로 그사회가 안정되어 있을 때에는 상생신앙이 고조되고, 세상이 불안정하다
든지 민심이 흉흉할 때에는 하생신앙이 성행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우리의 미륵보살에 대한 지극한 바람은 그를 미래불(未來佛)로서 신앙하는 것이다. 즉, 자비와 사랑으로 우리에게 평화
와 구원을 약속하는 부처님으로서 미륵불을 신앙하는 것이다. 이것은 하생신앙과 관련되어 있는데, 괴롭고 비참한 현실을 개혁하고 자신들
을 구원해줄 희망으로 미륵불을 인식하고, 미륵불의 하생을 간절히 원하게 된다. 통일신라기와 고려 초기에 등장했던 화랑도 정신이나 궁
예, 견훤, 묘청 등의 개혁사상이라든가 고려말의 신돈화상이 부르짖었던 '경자유전(耕者有田)'제도, 구한말에 등장한 천도교, 증산교 등을
비롯한 신흥종교운동도 따지고 보면 바로 이 미륵하생신앙의 실천적 표현이었던 것이다. 미륵보살은 그러기에 모든 중생들에게 희망을 주
는 부처님이며 언제나 서민들의 두터운 신앙을 지니고 있고 민중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이러한 내용은 <미륵하생경>,  <미륵성불경>에 상세
히 열거되고 있다.

   한편 “미륵보살은 미래세에 중생의 큰 귀의처가 되리니 만일 미륵보살에 귀의하면 무상도에 물러서지 않으며 미륵보살이 성불할 때에 부
처님의 광명을 보고 수기를 얻게 되리라”고 미륵상생경에 전하는 바에 따라 미래불로서 말세중생들의 귀의처가 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미륵보살이 하생하여 중생을 제도하는 용화세계는 완전 평등과 자유, 무소유가 이루어진 사회임과 동시에 인간의 탐욕, 성냄, 어리석음이
제거되는 완성된 세계이다. 경전에 의하면 미륵이 하생하는 계두성의 사람들은 이미 욕심과 성냄, 어리석음에서 벗어나 십선도(十善道)를
실천하고 있다. 불살생(不殺生), 불투도(不偸盜), 불사음(不邪淫), 불망어(不妄語), 불양설(不兩舌), 불악구(不惡口), 불기어(不綺語), 불탐욕
(不貪慾), 불진에(不瞋恚), 불사견(不邪見)의 십선공덕으로 성취되어 복덕과 쾌락이 구족한 세상이 용화세계이다.

   용화세계를 성취하게 하는 십선도는 몸과 입과 마음으로 지을 수 있는 모든 개인적, 사회적 악을 경계하는데 보다 큰 의미를 부여하며, 보
다 적극적인 의미에서는 선의 극대화로서 사회정의를 실현하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대보적경 미륵소문회>에는 미륵보살이 중생의 탐진치가 엷어지고 십선을 성취할 때에 최상의 정각을 이룰 것을 서원하였고, 석가
모니 부처님은 오탁악세에 탐진치의 업이 두텁고 중생들이 부모에 불효하고 사장(師長)에게 불경하며 권속이 서로 불화할 때에 최상정각을
이룩할 것을 서원하였음을 밝히고 있다.

   여기에서 미륵불의 무조건적인 하생이 아니라 미륵불 하생의 조건이 중생의 업에 따라 달려있음을 살펴볼 수 있다. 미륵불의 하생은 중생
의 주체적 실천에 따라 그 조건이 구비된다는 것이다. 즉, 용화세계는 그 세계를 구현하는 대다수 중생에 의해 99%의 기반이 조성되고, 마지
막 1%를 미륵불이 담당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용화세계를 여는 주체는 미륵불이 아니라 오히려 중생인 것이다.

 

3. 미륵상생경(彌勒上生經)

   원래 명칭은 <관미륵보살상생도솔천경(觀彌勒菩薩上生兜率天經)>으로 달리 <미륵보살반열반경>, <관미륵경>, <화생경>이라고도 한다.
<미륵하생경>, <미륵대성불경>과 함께 미륵삼부경을 이루고 있다. 내용을 살펴보면 12년 뒤에 미륵보살이 지상에서의 목숨을 다 마치고 도
솔천에 태어남을 설하고 있다. 그리하여 56억만 년 동안 천상의 모든 신들을 교화하고자 밤낮으로 끊임없이 설법함을 밝히고 있다.

   도솔천에 태어나 미륵의 제자가 되고자 하는 이에게는 십선(十善)을 행하도록 권유하고 있다. 또한 부처님의 형상을 생각하고 미륵보살
의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도 왕생할 수 있다고 설한다. 이리하여 도솔천에 왕생하는 것과 동시에 미륵보살로부터  설법을 듣고 반드시 생사
해탈하여 성도한다는 미륵신앙이 이 경전의 주된 내용이다. 또 이 경은 도솔천에 한번 왕생하면 질병, 사고 등으로 불행해지지 않고 그곳 나
이로 4천세를 누리게 된다고 밝히고 있다. 도솔천의 하루는 지상의 4백년에 해당한다. 그곳의 30일을 한 달로 하고 열두 달을 1년으로 계산
한 4천년  뒤에는 미륵보살이 사바세계로 내려와 성불하도록 되어 있다. 그때 천상의 모든 이들도 미륵보살을 따라 지상으로 내려와 부처님
의 설법을 듣고 곧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관무량수경>이 설하는 내용과 여러 가지 면에서 공통된 부분이 많아 거의 같은 시대의 경전임을
알 수 있다.  아마도 4세기 말에는 인도에서 유행하고 있었던 것이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우리나라도 삼국시대 불교 전래 초기부터 미륵신앙과는 특별한 인연을 갖고 있다. 특히 신라에서 미륵신앙, 용화사상(籠華思想)이 크게
성행했으며, 화랑도와의 관계성은 익히 아는 바와 같다. 중국 송나라 때 저거경성(沮渠京聲)거사가 한역했으며, 미륵신앙의 소의경전 중에서
도 주(主) 경전으로 애용되어 오고 있다. 주석서로는 중국 규기(窺基)의 <관미륵상생도솔천경찬>(1권)과 신라 원효(元曉)의 <미륵상생경종
요>(1권)가 있다. 원효의 <미륵상생경종요>는 한글로도 번역되어 후진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4. 미륵하생경(彌勒下生經)

   <미륵하생경>은 미륵보살이 다음 세상에 도솔천에서 인간세상에 내려와 용화수 아래에서 성도한 뒤 3회의 설법으로 중생을 제도할 것을
설한 경이다. 달리 <관미륵보살하생경>, <미륵성불경>, <미륵당래하생경>이라고도 한다. <미륵상생경>, <미륵대성불경>과 함께 미륵삼부
경을 이루고 있다.

   경전의 내용을 보면 부처님께서 기수급고독원(기원정사)에 계실 때 아난존자가 법을 청함으로써 부처님의 설법이 시작되고 있다. 먼 이
다음 세상에 인간세계가 욕심(貪), 성냄(瞋), 어리석음(癡) 등의 모든 번뇌가 사라지고 질병도 없어지는 그야말로 지상낙원의 시대에 이르면,
미륵보살께서 '수법마'와 '범마월'을 각각 부모로하여 이 세상에 태어나신다고 설하고 있다. 그리고 용화수 아래에서 성도하여 첫번째 법회
에서 96억인을, 두번째 법회에서 94억인을, 세번째 법회에서 92억인을 제도한다고 한다. 또한 그때는 우리의 수명도 8만 4천 세에 이르고
5백 세가 되면 결혼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사람들의 마음도 다 어질고 복스러워 모두가 화합하게 되니 마치 하늘나라에 사는 것과
같다고 한다. 한역본은 서진 태안 2년(308)에 축법호(竺法護)가 번역한 단역본으로 되어 있다. 여섯번 번역에 세 경이 남아 있다고 하여 6역
3존(六譯三存)이라고도 하는데, 구마라집의 <미륵하생경>(1권) 또는 <미륵수결경>(1권)과 진제(眞諦)의 <미륵하생경>(1권) 그리고 의정(義
淨)이 번역한 <미륵하생성불겅>(1권) 등이 있는 것으로 기록된 데서 그것을 유추할 수가 있다. 그러나 축법호의 번역본과 구마라집의 번역
본을 전혀 별개의 본으로 보기도 하는데, 전자를 제1역으로 보고 후자를 제2역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특히 원효(元曉)의 <미륵경>에
대한 주석서 <미륵상생경종요>를 보면, 미륵삼부경의 상치되고 있는 내용들을 쉽고 자세하게 풀이하여 그 문제점들을 제시해 주고 있어
<미륵경>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고 있다.


5. 미륵대성불경(彌勒大成佛經)

   <미륵대성불경>은 중국 후진 때 구마라집이 번역한 <불설미륵대성불경>을 일컫는다.  문장상 다른 점이 많아 별개의 경전으로 취급되고
있는 <불설미륵하생성불경>(미륵하생경, 구마라집역)과 내용상으로는 동일한 경전으로 보고 있다. 다시 말해 <미륵대성불경>이 대단히 긴
경전이므로 이를 요약하여 초출한 것이 곧 <미륵하생성불경>이라는 것이다. 당나라 의정(義淨)이 번역한 <불설미륵하생성불경>도 있으나
이는 다른 번역일 뿐이다. 이 경의 내용을 살펴보면 미륵보살의 국토(國土), 시절(時節), 출가(出家), 성도(成道), 전법륜(轉法輪), 도인(道人
), 견가섭( 見迦葉) 등에 대하여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성립연대는 일반적으로 기원후 260년경으로 보고 있다. <미륵하생경>의 4세기 말
성립설, <미륵상생경>의 그 후의 성립설에 비해 미륵계열 경전 중 가장 빨리 성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미륵상생경>이 도솔
상생신앙과 56억여년 뒤 미륵보살이 지상으로 하생하여 3회의 설법으로 중생을 제도한다는 내용까지 모두 포함하고 있는 반면, <미륵대성
불경>은 3회 설법에 의한 중생구제에 대해서만 설할 뿐, 사후(死後)의 도솔상생신앙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설하지 않고 있다. 그러므로 이
경에 의한 순수한 미륵하생신앙은 미래세에 3회 설법의 구제를 설할 뿐, 사후의 도솔상생신앙은 포함하고 있지 않다.  따라서 용화 3회에 대
하여 밝히고 있는 원문(願文)에도 도솔상생의 원(願)을 기술하고 있는 경우는 순수한 의미에서의 하생신앙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이렇듯
미륵이 도솔천에서 사바세계에 하생하여 성불할 때의 국토, 시절, 출가, 성도, 전법륜 등을 설한 비슷한 경전으로 <미륵대성불경> 외에도
<미륵하생경>(축법호 역), <미륵래시경>(역자미상), <미륵하생성불경>(의정역), <미륵하생성불경>(구마라집 역) 등이 있다. 또한 미륵보살
이 도솔천궁에 상생한 여러 가지 즐거운 일들을 설한 것으로 <미륵상생경> (저거경성 역)이 있다. 이들 모두를 더해 미륵본경(彌勒本經)이
라고 한다.


6. 미륵전(彌勒殿)

   미륵전은 미래의 부처님인 미륵불을 모신 법당의 이름이다. 이 미륵전은 미륵불에 의해 정화되고 펼쳐지는 새로운 불국토 '용화세계'를
상징한다고도 하여 용화전(籠華殿)이라고도 한다. 또는 미륵의 한문 의역(意譯)인 자씨를 취하여 자씨전(慈氏殿)이라고도 부른다.

   미륵보살은 인도의 바라나시국의 바라문 집안에서 태어나 석가모니 부처님의 교화를 받으며 수도하였고, 석가모니 부처님에 의해 미래에
성불하리라는 수기(授記)를 받은 뒤 도솔천(兜率天)에 올라가 현재 천인(天人)을 위하여 설법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직 성불을 하지 않
고 있는 이유는 네 가지 일(四事) 즉 국토를 정화하고 수호하며, 중생을 정화하고, 중생을 수호하기 위해서이다. 즉 석가모니 부처님이 구제
할 수 없었던 중생을 남김없이 구제한다는 대승적(大乘的) 자비사상에 근거하고 있다. 그 뒤에 그는 석가모니 부처님 입멸 후 56억7천만년
되는 때에 사바세계에 태어나 화림원(華林園) 안의 용화수 아래에서 성불하여 3회의 설법으로 272억인을 교화한다고 한다. 이때의 세계는
이상국토로 변하여 땅은 유리같이 평평하고 깨끗하며 꽃과 향이 뒤덮여 있다고 한다. 인간은 수명이 8만 4천 세로 늘어나며, 지혜와 위덕이
갖추어져 안온한 기쁨으로 가득차 있다. 용화삼회(龍華三會)의 설법을 통해 중생을 교화하여 이들을 진리에 눈뜨게 하기를 6만 년, 그 뒤에미
륵불은 열반에 든다.

   미륵전에는 미륵보살 혹은 미륵불을 봉안하는 2가지 경우가 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미륵불을 봉안하는 경우가 많다. 미륵전의 대표적 건
물로는 전북 김제의 금산사(金山寺) 미륵전을 들 수 있다. 미륵전의 1층은 대자보전(大慈寶殿), 2층은 용화지회(龍華之會), 3층은 미륵전이
라고 쓴 현판이 있어 미륵불 도량임을 나타내고 있다. 전북 익산의 미륵사지도 3회의 설법을 상징적으로 가람배치에 연결하여 3원(三院) 가
람의 독특한 형식을 취하고 있다. 혹은 용화세계를 상징화한 용의 초각을 기둥머리에 끼우고 용화전(龍化殿)의 현판을 달기도 한다.


7. 대표적인 미륵도량

(1)금산사(金山寺)

[위치]   전라북도 김제시 금산면 금산리 39번지 모악산(毋岳山)에 있다.

[소속]   대한불교조계종 제17교구 본사이다.

[연혁]   600년(백제 무왕 1) 창건했다. 법왕이 그의 즉위년(599)에 칙령으로 살생을 금하고, 그 이듬해 이 절에서 38인의 승려를 득도시켰
다. 신라시대 진표(眞表)가 762년(경덕왕 21) 중창을 시작하여 766년(혜공왕 2) 완공을 봄으로써 큰 절의 면모를 갖췄다. 이 때 진표는 미
륵장륙상(彌勒丈六像)을 조성하여 주존불로 모셨고, 금당의 남쪽 벽에는 미륵보살이 도솔천(兜率天)에서 내려와서 그에게 계법을 주는 모
습을 그렸다. 그러므로 이 절은 법상종(法相宗)의 근본도량이 되었으며, 고려시대에도 법상종에 속해 있으면서 <법화현찬(法華玄贊)>, <유
식술기(唯識述記)> 등의 법상종 관계 장소(章疏)들을 간행했다. 후백제시대에는 견훤의 숭봉을 받아 부분적인 보수가 있었다.

   고려시대에는 법상종의 대종사이자 왕사인 혜덕 혜현(慧德 韶顯)이 1079년(문종 33) 주지로 부임하여 퇴락한 절을 보수하고 새로운 법
당을 증축하여 창건 이후 가장 큰 규모를 갖추었다. 그는 또 절의 남쪽에 광교원(廣敎院)을 설립하여 간경, 법석(法席) 등을 주관하는 장소
로 사용했으며, 현존하는 이 절의 중요석물인 석련대(石蓮臺), 오층석탑, 노주(露柱) 등도 모두 이 때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1598년(조선 선조 25) 임진왜란 때 왜병의 방화로 모든 건물과 산내의 40여 개 암자가 완전히 소실되었다. 이 때 뇌묵 처영(雷黙
處英)은 이 절을 중심으로 승병 1천여 명을 이끌고 전투에 참가하여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이어 1601년(선조 34) 수문(守文)이 복원공사를
시작하여 1635년(인조 13) 낙성을 보았다. 고종때(1863-1907)에는 총섭(摠攝)으로 취임한 용명(龍溟)이 미륵전, 대장전(大藏殿), 대적광전
(大寂光殿) 등을 보수했고, 1934년 성렬(成烈)이 다시 대적광전과 금강문, 미륵전 등을 보수했다.

   1960년대와 1986년 이후 태공 월주(太空 月珠)가 주지로 일하면서 일주문을 비롯하여 금강문, 보제루(普濟樓), 미륵전, 대적광전, 대장전,
명부전, 승당, 서전(西殿) 등의 건물을 중수 또는 중건했다. 산내 암자로는 심원암(深源庵), 용천암(龍天庵), 청련암(靑蓮庵), 부도전(浮屠殿)
이 있다.

[유적/유물]   이 절의 유물.유적 중 일부 석조물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임진왜란 뒤의 조형들이다. 임진왜란 이전에는 사역(寺域)이 매우 커
서 대사(大寺) 지역, 봉천원(奉天院) 지역, 광교원 지역의 3곳으로 나뉘어 있었으나, 임진왜란의 참화로 총 86채의 건물이 없어진 뒤 40년만
에 대사 지역의 건물만이 재건되었고, 나머지 절터는 절의 동북쪽 넓은 지역에 유지만이 전해지고 있다. 또한 문화재로는 미륵전(국보 제62
호)과 노주(보물 제22호), 석련대(보물 제23호), 혜덕왕사진응탑비(慧德王師眞應塔碑; 보물 제24호), 오층석탑(보물 제25호), 석종(보물 제2
6호), 육각다층석탑(보물 제27호), 당간지주(보물 제28호), 석등(보물 제828호), 대장전(보물 제827호) 등이 있다. 미륵전은 신라시대로부터
거대한 미륵본존을 봉안했던 금당이며, 대적광전은 이 절 내에서 단층건물로는 가장 웅장한 건물로서 1597년(선조 30)정유재란으로 소실된
뒤 1635년 중건했으나, 1986년 12월의 화재로 소실되어 다시 1992년 복원되었다. 대장전은 본래 미륵전의 정면 우측에 위치하여 미륵전을
장업하게 하던 정중(庭中) 목탑이었다. 명부전은 1857년(철종 8) 비구니 만택(滿澤)이 재건했다. 석종부도는 미륵전 우측에 있는 방등계단에
있으므로 탑으로 오인하는 수가 있지만, 이는 수계의식을 집행하는 계단이다. 일반적으로 계단 앞에는 석등을 안치하는 것이 통례로 되어 있
으나, 이 곳에 석탑을 건립한 것은 불전의 정중탑 (庭中塔)을 건립하는 방식으로 불탑을 세운 것으로 보인다. 노주는 대적광전과 대장각과의
중간에 건립되어 있는데, 단순히 그 형태에 따라 노주라고 이름했으나 원래는 어떤 용도에 사용된 것인지 지금까지 알려진 바가 없다. 상부에
놓인 보주만 없으면 방형의 대좌처럼 조성된 특이한 석조물이다. 또한 심원암에는 북강삼층석탑(北崗三層石塔; 보물 제29호)이 있으며, 부
도전에는 혜덕 왕사의 탑비를 비롯하여 남악(南嶽) 선사의 부도 등 모두 11기의 부도가 있다.


(2) 관촉사(灌燭寺)

[위치]   충청남도 논산군 은진면 관촉리 반야산(般若山)에 있다.

[소속]   대한불교조계종 제6교구 본사인 마곡사의 말사이다.

[연혁]   968년(고려 광종 19) 혜명(慧明)이 창건했다. 이어 혜명은 1백여 명의 공장과 함께 970년 미륵보살상의 조성 공사를 시작하여 1006
년(목종 9) 완성했다. 1386년(우왕 12) 법당을 신축했으며, 1581년(조선 선조 14) 거사 백지(白只)가 중수했다. 1674년(현종 15) 지능(智能)
이, 1735년(영조 11) 성능(性能)이 중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유적/유물]   현존하는 건물로는 관음전과 삼성각, 사명각(四溟閣), 해탈문, 현충각 등이 있다. 문화재로는 석조미륵보살입상(일명 은진미
륵; 보물 제218호)과 석등(보물 제232호), 배례석(拜禮石;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53호), 석문(石門;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79호), 오층석
탑, 사적비 등이 있다. 이 가운데 배례석은 너비 40cm, 길이 150cm의 장방형 화강암 위에 팔엽연화 3개가 연지(蓮枝)에 달려 있는 듯이 실
감나게 조각되어 있다. 또 해탈문인 석문은 양쪽에 돌기둥을 세우고 널찍한 판석을 올려 놓은 것으로 창건 당시에 쇄도하는 참배객을 막기
위하여 성을 쌓고 사방에 문을 내었던 것 중 동문에 해당하는 것이다. 또한 이 절에는 1499년(연산군 5) 가야산 봉서사(鳳棲寺)에서 개판한
<목우자수심결(牧牛子修心訣)>, <몽산법어(蒙山法語)>, <심우십도(尋牛十圖)> 등의 판본이 소장되어 있었다. 이는 범어사의 영명(永明)이
옮겨 보관한 것이었으나, 그 뒤에 해인사로 옮겨 갔다고 한다.

[설화]   창건 당시 조성한 은진미륵에 얽힌 설화가 전해진다. 한 여인이 반야산에서 고사리를 꺾다가 아이 우는 소리를 듣고 가 보았더니 아
이는 없고 큰 바위가 땅 속으로부터 솟아나고 있었다. 이 소식을 들은 조정에서는 이 바위로 불상을 조성할 것을 결정하고 혜명에게 그 일을
맡겼다. 혜명은 1백여 명의 공장과 30여 년 동안 공사를 벌여 1006년 불상을 완성했다. 그러나 불상이 너무 거대하여 세우지 못하고 걱정하
던 어느 날, 사제총에서 동자 두명이 삼등분된 진흙 불상을 만들며 놀고 있었다. 먼저 땅을 평평하게 하여 그 본을 세운 뒤 모래를 경사지게
쌓아 그 중간과 윗부분을 세운 다음 모래를 파내었다. 혜명은 돌아와서 그와 같은 방법으로 마침내 불상을 세웠다. 그런데 그 동자들은 문수
보살과 보현보살이 화현하여  가르침을 준 것이라고 한다. 불상이 세워지자 하늘에서는 비를 내려 불상의 몸을 씻어 주었고, 서기가 21일 동
안 서렸으며, 미간의 옥호(玉毫)에서 발한 빛이 사방을 비추었다고 한다. 중국의 승려 지안(智眼)이 그 빛을 좇아와 예배했으며, 그 광명의 빛
이 촛불의 빛과 같다고 하여 절 이름을 관촉사라 했다고 한다.

   이 밖에도 이 불상에 얽힌 많은 영험담이 전해지고 있다. 중국에 난이 있어 적병이 압록강에 이르렀을 때, 이 불상이 노립승(蘆笠僧)으로
변하여 옷을 걷고 강을 건너니 모두 그 강이 얕은 줄 알고 물 속으로 뛰어들어 과반수가 빠져 죽었다. 중국의 장수가 칼로 그 삿갓을 치자 쓰
고 있던 개관(蓋冠)이 약간 부서졌다고 하며, 그 흔적이 아직도 남아 있다고 한다. 또한 국가가 태평하면 불상의 몸이 빛나고  서기가 허공에
서리며, 난이 있게 되면 온몸에서 땀이 흐르고 손에 쥔 꽃이 색을 잃는다는 등의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그리고 이 불상에 기도하면 모든 소
원이 다 이루어졌다고 한다.


(3) 세계사

   충북 중원군 상모면 미륵리에 자리잡고 있어 미륵리사지(彌勒理寺址)로 더 잘 알려져 있다. 그동안 잊혀진 절이었다가 1977년 청주대 박
물관 주관의 발굴조사로 알려지게 되었다.

   조사결과 ‘미륵당초(彌勒堂草)’라는 명문와(銘文瓦)가 발견되어 미륵사였음이 밝혀졌으나 창건연대나 절 이름 등은 알 수 없다. 일설에 의
하면 고려 태조 왕건의 조부인 작제건(作帝建)이 창건했다고도 하고, 신라의 마의태자가 금강산으로 들어가는 도중에 이곳에 미륵불과 5층

석탑을 건립했다고도 하나 이에 대한 기록은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았다.

   가람배치를 보면 북쪽으로 문이 있고 남쪽에 석탑과 금당이 있는데 이는 보통의 사찰 배치와는 정반대의 것으로 사찰 건립의 동기와 관련
있는 듯하다.

   금당에 모셔진 불상(보물 96호)은 갓을 쓰고 있는 형상으로 둥근 얼굴에 활 모양의 눈썹, 긴 행인형(杏仁形)의 눈, 넓적한 코, 적은 입술에
두툼한 입술이 특색이다. 신체는 소략한 옷 주름의 표현이라든가 앞으로 모아서 구슬같은 것을 잡고 있는 두손의 완만한 묘사 등, 상호(相好
)는 달리 단조롭게 표현돼 있다.

   석실은 불에 그을린 흔적이 있으나 불상은 전혀 그런 흔적이 없다. 또 다른 부분은 이끼가 끼어 있으나 상호부분은 전혀 이끼가 끼지 않는
이적(異蹟)을 보이고 있다.

   이 밖의 유적으로 보물 96호인 5층석탑과 지방문화재 19호인 석등, 온달장군이 가지고 놀았다는 공기돌(직경 1.5m)과 6m가 넘는 돌거북
등이 있다.


(4) 법주사

   법주사는 신라 진흥왕 14년(553)에 의신조사(義信祖師)가 천축에서 돌아올 때 나귀 등에 장경을 싣고와 산세가 웅장하고 사방이 험준함을
보고 속세를 떠나 불법을 펼 곳이라 생각하여 큰 절을 세워 법주사라고 했다고 전해진다.

   이 법주사와 미륵신앙과의 관계는 제1차 중창자인 진표율사에 의해 그 연을 맺는다. 삼국유사에는 영심(永深)이 융종(融宗), 불타(佛陀)
등과 진표율사에게 용맹참회하며 법을 구하자 가사와 발우, 미륵진생(彌勒眞栍) 제9간자와 8간자를 주면서 “제9간자는 법 그대로이고, 8간
자는 신훈성불종자(新熏成佛種子)인데 내 이미 너희에게 주었으니 이것을 가지고 속리산으로 돌아가라. 그 산에 길상초가 난 곳이 있으니
그곳에 정사를 세우고 이 교법에 따라 인간계와 천상계의 중생을 구제하고 또 후세에까지 유포시켜라”고 했다는 기사가 나온다.

   미륵신앙의 열렬한 주창자였던 진표율사와 영심대사에 의해 법주사는 미륵도량으로 자리잡았으며, 최근에는 청동미륵불상에 조성되었다.
불사가 회향하던 날 중생의 간절한 염원에 답하듯 미륵불상의 광배뒤로 찬란한 오색서광이 비추는 이적이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