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가사의 발생과 전래

①가사의 발생

 우리 스님들이 이교도들과 겉모습에서 다른 것이 세가지 있다. 흔히 削髮染衣라는 말로 표현되는데 첫째는 삭발이
요, 둘째는 물들인 의복을 입고, 셋째는 法衣 또는 法服이라 일컷는 가사를 수한다.

 첫째, 삭발의 의미는 출가의 본뜻이 無明에서 비롯한 번뇌를 끊고, 安心立命을 얻어 과거세의 업장을 소멸하고, 윤
회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것이기 때문에 인간이 소중히 여기는 머리카락을 과감히 자르고 오로지 수행에만 전념하고
자 하는 뜻일 것이다. (일부 스님들은 머리를 조금 기르기도 하고 어떤 스님은 수염을 길게 기르기도 한다.)

 둘째, 옷을 물들여 입는 것은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그 중 한가지는 원래 우리 민족을 白衣民族이라고 한 연유는
우리 조상들이 흰옷을 좋아했다고 한다. 그런데 조선시대의 斥佛政策으로 인하여 유생들이 스님들을 업신여기기도
하고 옷을 뺏기도 하는 일이 일어나자, 스님들은 관가에 하소연 해봐도 소용없고 하여 먹물로 물을 들여 입었더니
속인들이 탐을 내지 않았다고 하는 이야기도 있다.

 셋째, 法衣인 가사를 수하는데 원래 인도에서 法衣를 수하는 까닭은 호사를 위해 옷을 입는 속인들의 虛禮虛飾이나
벌거 벗고도 부끄러움이 없는 外道의 양극을 지양하고 신체 보호의 기본 조건을 갖춤으로써 수행인으로 하여금
中道를 따르게 하려는 데 근본 정신이 있기도 하고, 추위나 더위를 막고 치부를 가려 참괴심을 없앨수 있으며, 마을
에 나가 걸식할 때 출가 수행자라는 표시도 되고, 威儀를 청정하게 하기 위함이기도 하다. 따라서 法衣는 발우와 함
께 불교 수행자가 구비 해야 될 가장 기본적인 것이다.

 가사가 발생하게 된 또 하나의 직접적인 동기는 불교가 발생할 당시의 인도에는 96종의 外道들이 있었는데, 이런
와중에 새로운 사상을 가진 또 하나의 교단으로 출발한 불교에 귀의하는 신봉자가 늘어나게 되자 우리 불교 수행자와
외도들과 구분되어야 할 필요성에 의해서 불교적 의미를 함축한 형태로 法衣가 생겼다고 한다.

 그리하여 法衣 제정 당시에 三衣(5조, 7조, 9조)를 갖추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부처님께서 제자들을 데리고 비살라에
서 공양을 받고 나오시다가 이슬을 피할 수 없는 평지에 머물게 되었는데 초저녁에는 5조만 입고 있다가 한 밤중에
조금 한기를 느껴 5조 위에 7조를 입었고 새벽이 되니 더욱더 한기를 느껴 그 위에 다시 9조를 입어 비로소 추위를
감당하였다고 한다. 그 이후로 부처님께서는 가사 세 벌만 가지면 추위를 지낼 수 있다고 판단하여 제자들을 모아
놓고 三衣 이상은 갖지 말라고 제안 한데서 비롯된다 하겠다.

 그러므로 法衣(袈裟)가 발생하게 된 원인은 먼저 청정한 행상을 갖추어 수행자다운 태도를 나타내 보이고, 다음은
96종의 외도들과 구별하게 하려는 의도에서 제정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②가사의  傳來

 印度의 남방지역은 열대성 기후이므로 당시의 수행자들은 가사만 걸치고 생활하였다. 불교가 중국대륙으로 전파되
면서 經書와 함께 法衣인 가사도 전래되었는데 중국은 인도와는 기후도 다르고 禮와 도덕을 숭상하는 유교사회였으
므로 인도의 가사는 중국의 습속과 융화되어 그들의 속복 위에 겹쳐입는 형태로 정착하여 불교가 우리 나라에 전래되
면서 함께 들어왔다.

 중국의 북방 前秦의 王인 부견이 고구려 소수림왕 2년에 佛像과 불경과 가사를 고승 순도와 사신을 통해 왕실로 보
내 옴으로써 우리 나라에도 불교가 전래되고 가사는 수행자의 상징물로 여겨졌으며 백제와 신라에도 불교사상과 함
께 가사도 한반도 구석구석에 전해져서 僧侶에게는 없어서는 안되는 佛法의 상징성이 내포된 포교 자료도 겸하게 되
었다. 그 이유는 부처님께서 과거 인행시 할절을 허용하면서 몸소 보이신 인욕을 상징하기도 하고 가사를 一名 복전
의라고 하는 데서도 알 수 있듯이 인과를 설명하기 위한 방편이기도 하였다.   (이 부분은 추후 자세하게 설명 될 것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