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도와 정신건강 - 이순규(전남·광주시 이신경정신과의원 원장)

  10여년 전까지만 해도, 많은 정신환자의 호소 중 하나로써 효도를 못해 괴롭다는 말을 자주 들었다.
또한 효도를 못한 죄악감에 사로잡혀 우울해하는 사람도 많았다. 그러나 요즈음엔 효도가 문제시된
환자는 퍽 드물고, 효도에 관한 증상을 환자로부터 듣기란 더욱더 드물게 되었다. 그 이유가 무엇일
까? 한문문화 세대에서 영어문화 세대로의 시대적 변천이 그 중 큰 이유 중의 하나인 것 같다.

  몇 년 전 우리 집 애들이 학교 과제라면서 '우리집 가훈(家訓)이 뭐냐?'고 물어댔다. '가훈 갖기
운동'이 한창일 때였다. 마침 횡액으로 쓰여진 '효당갈력(孝當竭力)'을 가진 게 있어서 "효도는 마땅히
있는 힘을 다해야 한다"고 설명해 주다가, 《천자문(千字文)》에 있는 글귀라는 것을 뒤늦게 생각해
내었다.

  내가 7세에 국민학교 입학하기 전 겨울 한철을 서당에 다녔는데, 거기서 《천자문》을 떼었다. 그
때는 '하늘 천 따지, 감을 현 누르 황'부터 시작, '이끼 언 이끼 재, 온 호, 이끼 야'까지 줄곧 외웠다.
중간쯤 못 미처 '효도 효, 마땅 당, 다할 갈, 힘 력'이 있는데, 40년 후에야 그 부분이 입안에 맴도는
것이었다. '아! 나도 바로 한문문화 세대였구나. 어려서부터 무의식적으로 효도는 마땅히 힘을 다하
여야 하는 것으로 머리 속에 잠재되어 있었구나!'를 확인케 되었던 것이다.

  우리 집 애뿐만 아니라 요즈음 커 가는 애들은 '우유'라는 말보다는 '밀크'를 먹고 자라며, 텔레비전
의 CM송을 줄곧 부르며, 입는 옷·신발이 다 영어상표이며, 사는 집도 초가·한옥이 아니고 아파트·빌
딩이며, 집만 나가면 버스·택시를 타고 사는 현실이고 보니, 과연 영어문화세대이다. 그러니 효도란
생활언어를 익혀 보는 기회가 없는 것 같다.

  그러기에 <불효자는 웁니다>라는 노래를 부르던 세대에 비하면 모든 면에 큰 변화가 있음이 확실
하다. 집안·가문의 명예나 효도에 관한 가정 교육은 없어지고, "차 조심하라, 시험 잘 보라, 공부 잘
해라!"는 부모의 수없는 부탁 속에 자라고 있다. 또한 학교교육까지 인성교육은 거의 도외시되고 있
는 실정이니, 앞으로 어떤 변화가 올지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그러면 다음에는 정신건강면에서 예를 들어 효도의 개념을 살펴보기로 한다.

  전남 담양에 '용화사'라는 조그마한 절에 '묵담(默譚)'스님이 노년을 지내시던 때이다. 하루는 스님
을 뵙고 광주(光州)로 돌아오는 길에 한 신도와 동행케 되었다. 미국에 훌륭한 의사를 자식으로 두고
있는 할머니였는데, 자식을 잃은 것처럼 우울함에 빠져 있었고 여간 마음의 고통이 심한 게 아니었다.

  '자식은 품안에 품을 때가 자식이지, 먼 미국에 가 있어 볼 수도 없고, 아예 부모를 떠나버리고 없으
니 살수가 없다'고 하였다. 그 아들 입장으로는 여간 불효가 아닌 셈이었다.

  "보살님, 닭 키워 보셨어요?"

  나는 대뜸 닭 이야기를 꺼내 물었다.

  "암, 시골에서 봄이면 알을 품어 병아리 새끼를 깨면, 부지런히 키워, 아들 방학하기만 기다렸지요."

  "어미 닭이 병아리를 품고 다닐 때는 결사적으로 새끼를 보호하고 날개 밑에 품고 다니다가, 병아리
가 커서도 품속에 달려들면 어미 닭은 그 새끼를 입으로 쪼아 쫓아내지요?"하고 물었더니, "암, 그렇
고 말고요, 닭은 그러재 잉." 시원스레 대답하였다.

  "그러면 보살 님은 아들을 품에서 키워 훌륭한 어른이 되었는데, 계속 품안에 든 아들이 되기만을
생각하렵니까?"반문 하였더니, 그 보살님 얼굴 표정이 달라지며 대답이 없다. 그 뒤 그 보살님은 아
들을 잃은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이 잘못된 것을 알고 편히 지내다가 돌아가셨다.

  효도란 그 기준에 따라 어떤 것이 참 효도인지 어렵다고 하겠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어떻게 효도하
였을까?'를 생각해 본다. 출가 전에 결혼까지 하여 아들 라훌라를 낳고 나서야, 결국 야밤에 가축(家
畜)을 하였다. 성불을 하고 나서 끝내 아버지까지 제도하였다면, 가장 큰 효도를 한 셈이다.

  성불의 덕목(德目)은 지혜(智慧)와 자비(慈悲)라 한다. 즉 깨달음은 자기 자각이고, 자비는 자기실현
이다. 성불은 자아완성·자아의 확대·인격이 성숙이라고 표현한다면, 성숙된 인간의 효도의 모습은 병
아리 성장과정에 비유해서 이해해 보면 쉬울 것이다.

  병아리 때는 어미 닭 품에서 건강히 자라는 것 그 이상의 효도가 없을 것이다. 성장해 갈수록 먹이
를 찾아 활동하느라 어미 닭 품과의 거리가 멀어져간다. 끝내는 어미의 품을 떠나 독립 생활을 한다.
인간도 마찬가지다. 엄마 품에서는 엄마 젖을 잘 빨아 건강히 잘 자라면서 잘 웃어주기만 해도 큰 효
도이다. 3살 정도 되면 품에서 떠나 집안에서 잘 놀면 모자(母子)간 양쪽 다 편안하다.

  조금 지나면 동네 밖으로, 7세 때는 인근 학교에 다니고, 중학생이 되면 군(郡)단위 정도, 고교 때에
는 도(道)단위 정도, 대학 때는 국내 어디서나, 그 후에는 해외(海外)에 나가도 모자간 양쪽 다 편안한
것이다.

  궁극에 아들 편에서는 지구 아니 우주전체가 부모 품이며, 부모 편에서는 아들이 어디 있더라고 자기
할 일을 하면서 인격자가 되면 그것으로 즐거운 것이다. 그게 효도이다.

  부처님의 대자대비(大慈大悲)는 결국 사랑이 온 우주 생명체에까지 확대된 것이다. '나'로부터 시작
되는 자기 확대가 우주 전체에 이르렀기 때문에, 모든 생명을 사랑함이 즉 자기 자신을 사랑함인 것
이다. 중생제도의 개념 또한 자기 자신의 제도의 연속이며, 효도 또한 그러한 자기 자신을 길러준 은
혜에의 보답이다. 자기 확대가 크면 클수록 즉 정신이 건강할수록, 효도는 마땅히 힘을 다하게 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부모님의 은혜에 대한 보답인 효도는 부모를 포함한 뭇 중생을 사랑하는 일인 것이다.

  자기 인격의 성숙 정도에 따라 효도하는 방법이 다 다르고, 그 부모로써 느끼는 감정도 천태만상으
로 갖가지가 있다 하겠다.

  정신질환자의 경우를 보게 되면 마땅히 효도를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과 갈등에 사로잡혀 있어서,
정신이 약하여 자기마음의 괴로움을 이겨내지 못하므로, 효도를 입으로만 반복하여 부르짖는다. 그러
다가 정신이 좋아지면 말은 없어지고, 부모님에 대한 사랑을 행동으로 옮기고 있음을 본다.

  결국 효도는 인격완성의 덕목으로서 가장 가치 있는 삶의 표현이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