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가모니, 그의 생애에 대해서 우리는 줄곧 많은 관심을 쏟아왔고 비록 신화적이거나 과장된 표현
이 많을지라도 수 많은 전기를 통하여 그의 삶을 이해하고 추앙해 왔다. 그러나 우리가 정작 관심을
가져야할 대목은 그의 생애가 길에서 시작되어 길에서 끝났다는 사실이라든지, 또는 그가 영화로운
태자의 지위를 헌신짝처럼 팽개치고 구도에 나섰다라든지하는 그 생활양식의 전환에 앞서 깨달음을
통해서 그가 제시한 인간의 길이다.
인간과 세상을 바로 파악하고 그 삶이 지향할 바를 우리가 인식하는 태도는 이 세상을 살아가는 인
간들의 무엇보다 가장 기본적이고도 우선적인 과제가 아닐 수 없다. 따라서 만일 석가모니가 제시한
불교적 가치관이 인간이 지향할 가장 이상적인 가치관이 될 수 없을 때 그것의 생명력은 유한적일 수
밖에 없고 그것은 곧 석가모니의 한계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설령 불교적 가치관이
우리의 바람직한 가치관과 합치된다 하더라도 그 불교적 가치관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굴절되어 있
다면 문제는 다시 심각해질 수 밖에 없다.
사실 불교적 가치관은 오늘날 적지 않게 왜곡, 변질되어 있으며 그로 말미암아 인간과 사회에 불교
가 진정한 가치를 발휘하지 못하고 있음을 우리는 절감하고 있는 터이다.특히 한국불교는 1600년의
전통은 자랑하면서도 그 가치관의 정립에 있어서는 더없이 소홀히 함으로써 개인이나 민족의 향방을
제시하지 못한채 그 영향력은 점차 감소되어가고 있는 실정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불교적 가치관을 정립하고 그것을 구체화 시키는 작업이 끊임없이 진행되어야 할
이유를 갖게 되는 것이다. 그러한 작업의 일환으로 일단 인간이 지녀야 할 바람직한 시각, 다시 말해서
기본적인 삶의 인식태도를 불교의 가장 기본이 되는 교리 가운데서도 노른자라고 할 수 있는 사법인(
四法印)을 통하여 정립해 보고자 한다.
불교적 가치관은 인간, 그리고 현실을 그 출발점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불교가 인간을
기피하고 현실과 괴리(乖離)된 종교로 잘못 인식되어져 오고 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비록 불교적 가치관이 올바르게 그리고 풍부하게 사회화되지 못하고 있다고 해서 그 가치관이 가볍게
평가되어선 안될 것이다. 비유컨데 깊은 물일수록 퍼내기가 힘든 법이다. 그러나 그 물이 우리 인간이 마시지
않으면 안될 생명수라고 한다면 퍼내기가 힘들다고 해서 포기할 수는 없는 일이 아니겠는가? 따라서 삶의 재인
식과 그 극복을 위하여 사법인의 그릇된 이해를 바로 잡고 그것을 인간과 사회에 구체화 시킴으로써 불교가 명
실상부한 현실 종교로 이해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1)제행무상(諸行無常)
무상(無常)이란 단어가 허무나 염세 따위로 파악되어 온 것이 일반적인 기존 관념이다. 그러나 무상이란 글자
그대로 항상 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객관적인 냉엄한 현실 인식이다. 제행(諸行)의 행(行)은 존재에 대한
시간적 형성작용을 뜻한다. 즉 일체의 현상계는 끊임없이 생멸의 변화를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에
서 불교의 부정의 논리를 발견하다. 그 어느 것도 집착할 바가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은 곧잘 고정된
어떤 것을 설정하고 그것에 집착하기 마련이지만 실은 물질이나 마음이나 가변성을 나타내고 그에 의해 끊임없
이 변화하는 것이 우주일체의 보편적 원리인 것이다.
그리고 이같은 제행무상은 의지의 작용여하에 따라서 모든 현상계는 얼마든지 변화되어질 수 있음을 암시하
기도 한다. 즉 의지를 투자함으로써 변화의 진전을 가속화 시킬 수도 있다는 얘기다. 여기서 제행무상이 불교의
인과법칙에 연결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무상이나 인과법칙이 허무주의 또는 숙명론 따위로 잘못 수용
되어 오면서 그것이 상징하고자 하는 의미는 도리어 배반되어져 왔으며 그로 인해서 사회현실과 동떨어진 불교
, 지배자의 논리에 부응하는 불교가 되어 왔음은 불교역사의 주류를 차지했던 것이다. 즉 인간이 행사하는 어떠
한 의지도 그것은 무상한 것이며 인생은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이미 규정되어진 존재인 까닭
에 모든 것을 체념하고 긍정하는 가운데 자기만족을 꾀할 수밖에 없다는식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리하여 주어
진 조건에 대한 개혁의 의지를 발휘하지 못한채 어떤 절대적 힘을 설정, 그것을 의지하고 자기위안의 도구로 이
용해 왔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 같이 부정의 논리, 의지의 당위성에 대한 인식이 왜곡되면서 인간의 자기소외 현상은 더욱 두
드러져 갔다. 특히 현대와 같이 사회의 제반구조가 전문화, 분업화됨에 따라서 인간은 안정만은 우선적으로 갈
구하게 되고 사회적 모순에 대한 체념에 쉽게 영합함으로써 정신적 빈곤과 아울러 인간의 비인간화를 묵인하는
셈이 되었던 것이다. 이를테면 부정의 논리는 인간과 사회의 궁극적인 긍정을 향하는 영구혁명의 논리라는 점
에서 높은 가치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노만-필 의'적극적 사고방식"은 여기에서도 해당되고 있는 것이다. 사회
체제의 발전사를 보더라도 원시사회에서 중세 봉건사회를 거쳐 현대사회에 이르기까지 그 역사는 가변성에 근
거한 부정의 논리와 인간이 지불한 의지에 보상하는 식으로 발전해 왔던 것이다.
결국 사회체제의 변화는 시대의식을 변화시켜 왔지만 그것은 결코 우연적인 것이 아니라 과거로부터 부단한
의지를 축적함으로써 얻어진 결과였던 것이다. 이로써 역사의 초역사성을 우리는 제행무상에서 도출해내게된
셈이라 하겠다.
(2)제법무아(諸法無我)
불교적 가치관의 정립(中)
일체만법이 가변성을 갖는다는 것은 어떤 것이라도 고정불변하는 것은 없다는 것을 이미 의미하고 들어간다.
상주불변하지 않는 것에 "나"라고 집착할 만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이것이 제법무아이다. 다시 말해서 고정된
실체가 없다는 얘기는 서로 유기적인 상관관계에 놓여 있음을 암시하는 것이며 그것은 곧 만법이 서로 관계 속
에 존재한다는 불교의 연기관에 상통하고 있다.
인간을 놓고 보더라도 육체는 여러가지 요소의 가합(暇合)에 불과하며, 마음 역시 내 생각, 내 주관이 언제나
한결같이 이것이 내 모습이라고 단정 지어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인 것이다. 마찬가지로 사회에 있어서도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표현이 가리키듯이 사람은 혼자서 존재할 수가 없는 법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누구나 사회의
주체적 존재임과 동시에 사회의 객체적 존재이기도 하기 때문에 그 사회에 의해서 규제받는 바가 적지 않은 것
이다.
따라서 제법무아는 곧 공동체 의식을 주지시키는 것이며 자연히 무아적 행동을 요구하게 되는 것이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아라고 하는 고정 불변의 독립된 실체가 있다고 집착함으로서 나와 사회와의 관계를 어떤 주종의 관
계 또는 대립적 관계로써 일방적으로 파악함으로써 이른바 대승불교의 소승적 타성은 유감스럽게도 끈질기게 지
탱해 왔던 것이다.
현실이란 곧 사회역사를 말한다. 그러니 역사나 사회를 외면한채 현실구원을 외친다는 것은 자기기만일 수밖
에 없으며, 추상성 관념성의 차원을 넘어설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즉 객관적 상황의 연관성 속에서 전체적
실상을 구조적으로 파악하는 것이 연기관이며, 모든 인간을 자아와 한 몸이라는 차원에서 그것을 극복하고자 하
는 것이 무아행이 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현실적 고뇌가 생리적 고뇌에 앞서는 과제임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며 소위 보살도정신이 절
실한 이 시대의 상황을 인식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일체개고(一切皆苦)
불교에서 문제의 해결은 고(苦)의 철저한 인식으로부터 출발한다. 그것이 없이는 해탈을 지향하는 동기의식이
희박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불전에 따르면 싯달타의 고뇌는 사문유관(四門遊觀)을 통하여 절정에 달한 것으로 되어있다. 인간의 고뇌, 자신
의 고뇌에 대하여 정면으로 맞닥드림으로써 그는 도피적 세계에 안주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출가의 행위로 보였
다. 그러나 앞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석가모니와 똑같은 깨달음을 소위 괴로움의 바다인 이 사회가 지금 요구하
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많은 불교인 조차도 불교적 고뇌의 정체가 인간들의 지극히 보편적 생멸현상인 생, 노,
병, 사, 가 전부라는 사고영역을 좀처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존재에 대한 본질적 궁극적 질문만이 인간의 고뇌
로써 역사사회에 거론될 수 없다는 사실은 부언의 여지가 없다.
생, 노, 병, 사에서조차도 현실적이고 구조적인 모순에서 빚어지는 많은 고통들이 그것을 장식하는 것을 우리는
목격할 수가 있는 것이다.
선사시대부터 인간과 자연에 던져진 본질적, 궁극적 질문들이 물론 인류와 더불어 그 전통을 같이 할지도 모르
지만 역사사회의 무게가 급격히 가중되어 가는 현실은 그러한 질문과 고뇌에 대한 자신을 떠맡길 여유나 조건이
되어 있질 못한 것이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현실을 해결하기 위한 근원적 질문들이 경직되어 받아들여짐으로 해서 역사현실에 반영되
지 못한 채 관념적 사고 활동에 그치고 있음이 불교의 비역사화를 추진시켜 왔음을 우리는 지적하고 넘어가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중생이 살고 있는 현장의 고통을 철저히 분석하고 진단함으로써 그것을 해결하려는 의지를 발휘하여
야만 불교가 출현한 가치는 회복될 수가 잇는 것이다.
역사사회적 객관세계와 현실구조적 자아와의 모순이 운명적으로 해석되어 질 때 역사는 배회를 거듭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고통의 초자연적 인식은 인간사회에서 설득력을 상실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중생이 없는 부처는 불필요한 형상일 뿐이다.
중생의 현실적 고통을 외면할 떄 그 부처는 사회구조속에서 지배자의 시녀로 전락한다. 불교이념의 역사관이
고의식(苦意識)과 만날 수 있어야 불교가 역사사회에 뿌리를 내릴 수 있는 것이지 그렇지 않고서 개인적, 근원적
고통만을 고의식의 전부로 파악하고 그리고 그것의 해결이 객관사회의 문제해결이라고 생각한다면 불교는 결코
사회현실의 에너지가 될 수 없을 것이다
불교적 가치관의 정립(下)
인간의 목적은 부처도 아니고 신도 아니며 오직 인간 자체이다. 따라서 인간에 의해 출현한 종교의 목적도 궁극
적으로는 인간인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고통과 대결한다는 것은 결국 인간과의 투쟁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종교적 신념에서 우러나오는 행동은 언제나 이같은 일체개고의 상황을 해결하고자 하는 것에 연결되지 않으면
안될 것이며 그것은 곧 역사의식과 자기 혁명을 획득하는 일인 것이다.
(3)열반적정(열槃寂靜)
이상과 같은 인간현실을 인식할 때 오늘날 요구되는 것은 부처가 아니고 보살인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다. 이리
하여 자의식, 역사의식이 전혀 필요없을 때를 가리켜 우리는 열반적정의 시대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열반적정이란 결국 무아실천을 통해 체험되는 궁극적 경지를 종교적으로 표현한 말이기 때문이다.
흔히 "열반적정"하면 선(禪)을 통해서 얻어지는 정신적, 초월적, 신비적인 어떤 경지를 상상한다. 그러나 禪역시
인간에게 있어서 수단일 뿐이며 열반적정 또한 현실밖에 동떨어져 있는 영역이 될 수 없는 것이다.
번뇌가 바로 보리라고 하는 말은 이같은 열반적정이 자의식이나 역사의식에서 비롯되어 진다는 의미를 갖는다.
즉, 깨달음이란 인간적인 生의 진실을 명확히 주장하기 위해 필요한 자세와 본연의 상태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라 하겠다. 따라서 열반적정은 생의 현실을 극복함을 강조하는, 말하자면 존재와 당위의 합일을 꾀하는 실
천적 이념인 것이다.
결국 열반적정을 지향하는 깨달음이란 완결이나 종착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보다 바르게 스스로를
연마해 가는 노력의지의 내적 확인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역사사회의 현실과 우주의 본질에 대한
깨달음 못지 않게 아니 그보다 훨씬 더 시급한 중생구제의 방편인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명실상부한 행복에 충격을 주는 일체의 요소를 제거시키는 것이 바로 열반적정을 향하는 바
람직한 방향임을 우리는 인식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상과 같은 불교적 가치관으로 볼 때 인간의 역사는 고(苦)의 극복의 역사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의지의 행사여부에 따라 그 본래적 가변성을 촉진시킬 수 있으며 그것이 연기적 공동체의식에서 발현되
어져야 함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작업은 유(有)에 대한 거의 선천적인 시각이 조정되지 않은 한 기대하기가 어려움을 엿보게 되
었다. "유"에 집착함으로써 자의식, 소유의식이 싹트고 결국 불화와 가치관의 혼란까지 빚어졌음을 인식한다면
유(有)가운데서 무(無)를 보고, 무 가운데서 유를 볼 수 있는 그런 혜안(慧眼)으로써 우리는 열반적정의 단계과정
을 밟아 나가야 할 것이다.
여기에 사홍서원(四弘誓願)의 당위성이 대두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방법상에 있어서 잘못 왜곡된 불교적 가치
관도 조정시킴으로써 그 과정이 순조롭게 진행될 수 있도록 종교적 에너지를 공급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특히 한국불교는 이 시대 우리 민족의 대 과제인 남북 분단의 실상을 직시하고 아울러 사회의 구조적 모순과
중생의 고통의 진상을 파악하여 이 시대 민족이 요구하는 종교가 되어야 할 것이다.
만에 하나라도 소수의 기득권자와 야합하여 교단발전을 꾀하고자 한다면 그것을 불교적 가치관을 정면으로
배반하는 일일 것이며 결국 불교는「인간의 길」이 아닌「지배자의 길」을 안내하는 그런 기능을 행사하는 집
단으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불교적 가치관을 정립하는 길은 어떤 형체의 권력일지라도 그것을 절대화시키는 것과 투쟁함으로써 가능해지
리라 확신한다.